top of page

Homecoming(귀향)

귀향! Homecoming! 잃어버린 두 아들에 대한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은 누가복음 15장 전체의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전체의 맥락-추방과 귀향-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추방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귀향(아버지 품으로 돌아옴)이라는 주제입니다. 세계를 향한 소망-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혹은 세상 쾌락을 추구하여, 먼 나라로 떠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실망입니다. 무엇에 가장 큰 실망을 느꼈을까요? 저는 아마 자기-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는, 현실을 신뢰할 수 없음에 대한 자각, 그리고 가난과 배고픔! 그래서, 아버지 집 음식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1. 고향을 그리워하는 인간

집/고향이라는 장소와 관련된 강력한 감정들은 우리가 자기-자신이 되거나, 참된 자아 발견을 위한 장소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나타내줍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어떤 장소나 가족도 이러한 열망을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고향은 아버지께서 계신 천국이거나 아니면 에덴동산인데, 우리는 거기서 쫓겨나왔으며, 영혼 깊은 곳에서 그 때, 그 임재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곳은 그림자일 뿐으로, 본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집의‘아버지’였으며, 우리는, 둘째아들처럼, 그분의 권위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없이 살고 싶어 했고,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리 떠나갔습니다. 성경은 그 이후로, 우리가 계속 영적인 유배생활 속에서 갈팡질팡 헤매며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갈망과 맞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진정한 집은 우리가 도망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임재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성경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인류가 참 집/영혼의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애쓰는 유배자의 무리라는 메시지를 인류에게 던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우리 모두, 인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귀향(Homecoming), 왜 이토록 어려운가?

둘째 아들은 성공적으로 귀환한 것일까요? 둘째 아들의 죄가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그 장벽을 돌파할 줄 모릅니다.동일하게, 성경은 인류의 귀환의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작은 출애굽과 귀향들은 선지자들이 약속했고, 백성모두가 갈망했던 귀향을 끝내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내부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인류 모두, 이기심, 자만 그리고 죄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투쟁들에 의해, 억압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바로 우리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주위환경(Environments)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타락한 상태의 자연환경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세계는 우리의 갈망하는 집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최종적인 귀향은 인간본성의 회복과 물질계의 변화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3. 구원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인간의 오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기적적인 귀환에도 불구하고 불의와 억압, 상실과 고통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귀향을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적 해방으로 이해했고, 메시아는 군사적 힘과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했습니다. 사역을 하는 동안 예수님은 방랑을 하였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정치적, 경제적 권력과는 담을 쌓고, 전통과 문화와 사회의 네트워크 바깥에서 머물렀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은 영적 유기와 유배의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국가(이스라엘)만을 정치적 억압에서부터 구원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온 인류)를 죄와 악, 그리고 죽음자체로부터 구원하고자 왔던 것입니다. 예수는 모든 인류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오시었습니다. 자기 백성들도 영접치 않았을 뿐더러, 주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버렸습니다.

4. 역사의 종말에 벌어질 잔치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파쇄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계가 우리의 진정한 집이 되지 못하게끔 막고 있는 사망의 세력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어 승리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탕자 이야기 결말에는 귀향의 잔치가 나옵니다. 그와 같이 요한계시록의 끝 부분, 즉 역사의 마지막 때에도“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등장합니다(계 19장).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잔치는 새 예루살렘, 즉 이 땅을 채우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벌어집니다.

역사의 마지막 때에는 이 땅 전부가 다시금 하나님의 동산이 될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우리는 영원한 고향집에 도착할 것이며, 아버지는 우리를 맞아 끌어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Featured Posts
Recent Posts
Archive
Search By Tags
아직 태그가 없습니다.
bottom of page